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마쓰오카 집안의 6남. 메이지 8년(1875), 진토군 쓰지카와 마을(현 후쿠사키정 니시타와라) 출생. 상경 후 모리 오가이를 만나 시인 마쓰우라 슈헤이에 사사. 다야마 가타이, 구니기다 돗포, 시마자키 도손 등의 문학 동료와 깊이 교류하였으며 「문학계」에 신체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왜 농민은 가난한 것인가」라는 말에 나타낸 것처럼 당시의 사회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의문으로 문학에의 경도를 끊고 농정학에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도쿄 제국 대학에서 수학 후 졸업과 동시에 농상무성에 근무했습니다. 근무하는 한편으로는 각지를 여행하여 지방에 남아 있는 풍습과 민속을 연구했습니다. 『후수사기』, 『도노 이야기』 등 민속학과 관련된 책을 저술한 것은 이 무렵입니다. 또한 잡지 『향토연구』의 창간은 민속학이 독자적인 영역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이쇼 8년(1919)에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듬해 아사히 신문사의 객원이 되어 전국을 여행하며 조사하였고 『해남소기』 등의 기행문을 발표했습니다. 쇼와 5년(1930), 아사히 신문사를 퇴직한 후에는 더더욱 민속학에 전념하여 잡지 「민간전승」의 창간이나 민속학 연구 그룹 확대 등에 노력했습니다. 그 후의 반생 동안, 일본 각지의 전승 기록을 집대성 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일본 민속학을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민간 전승론』, 『해상의 길』 등 많은 저작을 남겼습니다.
 쇼와 26년(1951)에는 문화 훈장을 받았습니다. 쇼와 37년(1962)에는 후쿠사키정 명예 정민 제1 호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88 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당 기념관 소장품 ◆
저작물, 편집물 (잡지 · 간행물), 원고, 편지, 엽서, 책상
졸업증서, 대전에서 착용한 의관(근무복) 및 소쿠타이(정장), 동상 등



야나기타 구니오가 애용했던 책상
본 기념관은 헤세 23년(2011) 4월 1일부터, [후쿠사키정립 야나기타 구니오 · 마쓰오카가 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후쿠사키정립 야나기타 구니오 · 마쓰오카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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